창작수필

고훈식의 ‘허공虛空’ 감상문

청비바리 2010. 4. 9. 01:30

 

                     고훈식의 ‘허공虛空’ 감상문


                                                                    오현진


  허공 있으니

  비가 내리고

  어둠이 쌓이고

  저 짙은 피안에서 새알은 꿈꾸고 있네

  구름이 흐르는 새벽에

  해도 뜨고

  눈부신 빛이 퍼져서

  물고기의 비늘도 반짝이네

  바람소리

  물결소리

  오래전에

  말하다가 죽은 영혼들의

  遺言이 떠도는 虛空  

  저 깊은 무한을 향해

  나도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을 남기네.


                       -고훈식님의 「허공虛空」전문-


  허공이 있으므로 해서 비도 내릴 수 있고, 어둠도 쌓일 수 있다. 허공이 있기에

저 너머 또 다른 세상에서 희망을 품은 새알이 미래를 꿈 꿀 수 있다. 허공이 있기

때문에 날이 밝고, 수면위에 퍼지는 눈부신 햇살이 물속에서 유유히 유영하는 물고기의

비늘에 반사되어 보석처럼 빛난다. 바람소리, 물결소리도 받아들이고, 삶의 희노애락과

헤아릴 수 없이 숱한 사연들을 품은 영혼들이 남긴 마지막 말(遺言)이 떠도는 허공.

 그 모든 존재의 의미를 품어안은 허공의 깊은 무한을 향해 시인은 말한다. 사랑한다고,

그대를 사랑한다고……. 이름모를 누군가에게 고백한 사랑, 그것은 연인끼리의 사랑일

수도 있고, 종교에서의 조건없이 베푸는 범 인류애적인 사랑일 수 도 있을 것이다.

 「虛空」은 고훈식 시인이 1991년 전주의 ‘표현’誌를 통해 등단한 작품으로, 첫 시집인

『無名의 바다에 잠긴 돌』에 수록되어 있다.

「허공虛空」을 읽으면서 까닭모를 아련함이 느껴졌다. 공허하고 막막한 이름없는

공간으로만 여겨왔던 허공이 고훈식 시인의 ‘허공虛空’으로 인해 새롭게 다가왔다.

이「허공虛空」이라는 詩에서 허공은 그저 비어있는 무의미한 공간이 아니다.

마치 김춘수 시인의 詩 「꽃」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줌’으로 인해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그’가 존재의 의미를 부여받은 것과 같이, 허공 역시 시인의 섬세한 감성과

새로운 발상에 의해 신선한 시어詩語로 다듬어지고 조각되어 재탄생되었다고 할 수 있다.

허공은 텅 빈 죽은 공간이 아니라 우리네 삶의 기쁨과 슬픔, 生과 死, 빛과 어둠, 그리고

사랑과 미움등이 공존하는 살아있는 공간인 것이다.

 아무리 하찮은 미물일지라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데는 그만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말이 있다. 다만, 우리가 그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단 한순간도 없어서는 안될 공기의 소중함을 잊고 살듯이, 허공 또한

아무 의미없는 공간으로 가벼이 치부해 버렸던 것이 사실이었다. 세상에 어느 하나

의미없는 존재, 무가치한 존재가 있을까만은 허공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 하나

귀하고 소중하다. 허공은 이제 더 이상 적막하고 외로운 공간이 아니다.

생명이 살아 숨쉬는 공간, 싱싱한 생명력으로 펄떡거리는 생선처럼 생기가 넘쳐흐르는

허공은 아름답다. 아름다운 허공속에 가슴 뜨거운 사랑 하나 묻고, 내 한 몸 머물다간

작은 흔적 하나 남길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무엇이 있으랴.  

 

                                                                                             -2007.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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