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김시민과 진주대첩
사진출처: KBS대하사극 <불멸의 이순신>
출처 : on-Air
김시민은 1554년 충청도 천안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부터 총명하고 기골이 장대하였으며 병정놀이를 좋아했다. 여덟 살 때 병정놀이를 하고 있는데 마침 원님 행차가 있어 수행원이 길을 비키라고 하자 소년 김시민은 거리낌 없이, “한 고을 사또라고 감히 진중을 함부로 통과할 수가 있느냐”고 소리쳤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원님은 말에서 내려 김시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큰 재목이로구나”라고 칭찬하고 길을 비켜 지나갔다 한다. 김시민은 25 세 때에 무과에 급제하였고 훈련원 판관이 되었다. 판관으로 근무하던 중, 무기가 녹슬고 기강이 해이하여 유사시에 쓸만한 병기와 군인이 없음을 개탄하여 병조판서에게 군기보수와 훈련강화를 수차례 건의하였는데 오히려 질타만 당하였다. 이에 김시민은 미련 없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그후 여진족 토벌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고 1591년에 진주판관에 임명되었다. 그 다음 해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왜군이 경상도 남부를 휩쓸자 놀란 진주목사 이경은 부하들을 데리고 지리산으로 피난하였다. 상부에서 이경에게 사람을 보내어 성으로 돌아가 성을 지키라고 명령하였는데 그가 산중에서 병사하여 판관 김시민이 목사을 대리하게 되었다. 왜군이 이순신 함대에 의해 격파 당함으로써 진주의 위기가 해소되었다. 왜군은 남해안을 따라 수륙병진을 기도하였으나 한산도에서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에 7월 하순 육로로만 서진하여 진해 고성을 점령하고 8월초에 진주를 위협하였다. 김시민은 각지에 구원병을 요청하며 진주성 방어태세를 강화하였다. 왜군은 남강 남안까지는 진출하였으나 강을 건너 진주성을 공격하기기 쉽지 않다고 판단하고 사천으로 물러나 거기에 거점을 확보하려 했다. 김시민은 과감하게 일천 명 군사를 동원해 사천성 왜군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추격해 고성과 진해도 탈환하였다. 조정에서는 그의 공을 치하하고 목사로 승진시켰다. 김시민은 목사 취임 후 민심을 추스르며 진주성을 수호할 방책을 강구하였다. 수성군에 맹훈련을 실시하고 병기를 제작하였다. 화학 무기의 중요성을 깨닫고 화약 오백여 근을 제조하였는데 이는 왜군의 제조방법을 입수하여 모방해 만든 것이었다. 새로이 대포 칠십여 문을 제작하여 부하들에게 대포 사용법을 연마시켰다. 김시민은 왜군이 거창으로 침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정병 일천 명을 거느리고 진격하여 많은 적을 죽였다. 김시민에게 연파당한 왜군은 김해에서 작전회의를 열어, “경상도 병마 주력이 진주성에 있는 듯하니 이 뿌리를 먼저 뽑아버리면 다른 방면에서 시끄럽게 움직이는 조그마한 군사들은 겁에 질려 스스로 흩어져 소멸되어버릴 것이다. 대부대를 동원해서 먼저 진주성을 함락시키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다”는 결론을 얻고 진주성 공략에 총력전을 벌리기로 결정하였다. 왜군은 8월 중순 경부터 진주성 공격준비에 나섰다. 서울 쪽의 정예군이 김해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9월 24일 왜군이 김해성을 출발하여 진주성으로 향하였다. 총대장은 우키다로 이삼만 명의 병력이었다. 왜군은 삽시간에 노현, 창원, 함안 등지에서 조선을 격파하였다. 조선군은 사망자가 팔천여 명에 이르러 전의를 상실하고 백성들은 겁에 질리었다. 진주성으로 진군하는 왜군의 기세는 회오리바람 같았다. 적의 진주성 공략작전개시 보고를 받은 김시민은 성 방어 준비에 나섰다. 그러나 부하장수들은 성을 버리고 달아날 궁리만 하였다. 김시민은 광장에 군민을 모아놓고 싸울 것을 호소하고 ‘성을 떠나겠다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목을 베겠다’고 호령하였다. 그리고 전라 의병장 최경회, 경상 의병장 곽재우 등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김시민 휘하 군사는 삼천팔백여 명이었다. 적은 수만 대군인데 수비군 삼천여 명은 너무 적었다. 김시민은 적이 이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을 우려해 성중의 남녀노소를 모아 모두 남자 옷을 입혀서 밖에서 보면 군사들로 보이게 하였다. 창원에서 왜군에게 패하여 퇴각하여온 경상우병사 유숭인이 성안으로 들어가 함께 방어할 것을 김시민에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김시민은 직책상 상급자인 유숭인이 합세할 경우 지휘체계에 문제가 발생할 것을 우려해 거부하였다. 곽재우는 그 소식을 듣고, “김목사의 판단은 실로 진주인의 복이로다!”고 감탄하였다. 왜군 선발대 일만여 명이 진주 동쪽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본격적인 진주성 공격 이전에 주위의 지원부대를 제압할 목적으로 먼저 유숭인의 부대를 공격하였다. 성안으로부터 일체의 도움을 받지 못한 유숭인군은 적의 대군을 맞아 용감히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모두 전사하였다. 김시민은 성밖에서 유숭인 군이 전멸하는 것을 두 눈으로 뻔히 보면서도 나가 지원하지 않았다. 김시민으로서는 진주성을 지키는 것이 최우선의 임무였다. 10월 6일 왜군의 본대가 도착하기 시작했다. 조선의 성은 중국이나 일본의 높고 견고한 성에 비하면 담장에 불과한 것이었다. 일부 산성을 제외하면 평야지대에 위치하여 성벽으로 넓게 마을을 둘러싼, 소극적인 방어용일 뿐이었다. 백년전쟁 공성전에 이골이 난 왜군이다. 그들은 담장 같은 진주성쯤은 단숨에 함락시켜버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구름같이 몰려온 적군이 성을 겹겹으로 포위하였다. 김시민은 아내와 함께 친히 주식을 가지고 성을 돌아다니며 군사들에게 먹이면서 격려하였다. 이에 군사들은 감격하여 죽기로 싸울 것을 맹세하였다. 왜군은 진주성 동, 서, 북 삼면을 포위하였다. 남쪽은 절벽으로 남강이 흐르고 있었다. 성을 포위한 왜군은 성 외곽의 조선 의병부대가 배후를 위협하고 있어서 바로 공격하지 못하였다. 김시민은 부하들에게 화살 한 대, 총알 한 발을 함부로 못쓰게 하였다. 밖에서 잘 보이는 곳에 큰 깃발을 세우고 장막을 친 다음 군사 복장을 한 남녀노소 백성들을 배치하였다. 그래서 왜군은 수만 조선군사들이 성 수비에 임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진주성을 응원하러 온 외곽의 곽재우 등의 조선군은 왜군의 배후에서 횃불을 들고 뛰어다니며 피리를 불었다. 심리전을 전개하여 왜군은 교란시키고 성내의 조선군에게는 힘을 실어주기 위함이었다. 왜군도 심리전을 구사하였다. 군사들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뿔이 있는 금색 가면을 쓰고 잡색 기를 짊어지거나 붉은 해가리개 또는 흰 칼날을 들고 성을 돌았다. 그 괴기한 형상에 성안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이윽고 왜군이 성 공격을 시작해 조총수 일천여 명이 일제히 사격을 퍼부었다. 총탄이 비 오듯 성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조총병들은 민가의 대문짝을 떼어다가 방패로 삼아 성으로 접근하며 연속 사격을 가하고, 대포도 성을 향해 쏘았다. 그러나 성안에는 전혀 동요가 없어서 사람이 없는 성같이 고요하였다. 성밖 왜병들의 기운이 쇠했다싶자 성안에서 일제히 소리 지르고 북을 두드리며 대포를 쏘기 시작했다. 일본 군사들이 돌아서 흩어져 민가로 들어가서 마루판까지 뜯어 가지고 와서 방패로 삼고 총을 쏘며 다시 성으로 접근했다. 공방전은 해가 지고도 계속되었다. 총 쏘는 소리가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성밖 왜군 막사 곳곳에 피워놓은 모닥불들이 사방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곽재우 군사 이백여 명이 뒷산에 올라가 호각을 불고 횃불을 흔들어 성안을 응원하자 성안 사람들도 호각을 불어 응하였다. 그러자 당황한 일본 군사들이 우왕좌왕하여, 소란을 벌였다. 7일 왜군이 하루 종일 조총과 활을 쏘며 공격했으나 수비군이 잘 막아냈다. 왜군은 진주성 주변 십여 리 안팎의 민가를 약탈하고 불태워 재로 만들었다. 날이 어두워져 전투가 일단 끝났다. 공격 측이 피해가 더 많고 지치는 법이다. 왜군은 이날은 야간공성전을 벌이지 않았다. 일본장병들은 삼삼오오 땅바닥에 쓰러져 누워서 피로를 풀고 있었다. 달빛 아래 진주성은 낮에 본 성곽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담장이 아니라 천 길 철벽처럼 보였다. 서늘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문득 거문고와 퉁소 소리가 바람에 실려 왔다. 왜군 장병들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하며 그 소리 나는 쪽을 주목했다. 분명히 진주성 안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김시민이 악공(樂工)을 불러 거문고를 타고 퉁소도 불게 한 것이었다. 수비군에게는 마음의 안정을 찾게 하고 적군에게는 여유를 보이려 함이었다. 일본 장병들에게 김시민은 도술을 부리는 신인(神人)같이 보였다. 당황한 왜군 수뇌진은 자신들도 심리전을 쓰기로 했다. 진영 안에는 잡혀온 조선 팔도 각 지역 아이들이 있었다. 그 조선아이들에게 성을 돌며, “서울이 이미 함락되었고 팔도가 붕괴되었습니다. 아저씨들이 새장 같은 진주성을 어떻게 지키겠어요. 빨리 성문을 열고 항복하세요”라고 외치게 시켰다. 아이들은 각 지역에서 잡혀온 터라 혹 서울말로 혹 팔도 각 사투리로 말하며 성을 돌았다. 아이들이 쓰는 각 지역 말투는 서울과 팔도가 무너진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였다. 8일 아침 왜군은 드디어 대대적인 진주성 공격을 감행하였다. 사다리를 성벽에 걸치고는 필사적으로 기어올랐다. 성안에서는 그들을 향하여 돌을 던지고 끓는 물을 끼얹었다. 이에 격퇴된 일본 군사들은 이번에는 성보다 높은 삼층 누각의 수레를 성 앞으로 끌고 와서 그 위에서 성안을 향하여 조총사격을 가했다. 성안에서는 군민들이 맞서 대포와 화살을 쏘았다. 대포탄들이 날아가 누각 수레를 박살내며 왜군들을 무더기로 살상했다. 그래도 왜군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불화살에 대비하여 소나무와 짚더미를 물에 적신 다음 성 앞에 높이 쌓아놓고 성위로 넘어가려고 하였다. 성안에서는 그것들을 태우기가 어려워지자 화약봉지를 속에 넣고 묶은 장작더미에 불을 붙여 아래로 던졌다. 그러자 화약이 터지면서 불붙은 장작개비가 사방으로 날아가 성 아래에 왜군이 갖다놓은 물젖은 소나무 가지와 짚더미에도 마침내 불이 옮겨 붙었다. 물젖은 소나무에 일단 불이 붙으면 무섭게 타는 법이다. 왜병들이 수없이 타 죽었다. 그러나 왜군은 계속 늘어나는데 구원 관군은 오지 않고 있었다. 성안에 화살이 떨어져갔다. 김시민은 낙심하지 않고 몸소 물통과 미음을 가지고 다니면서 배고프고 목마른 병사들에게 먹였다. 그는 포알이 비같이 쏟아져도 꼼짝 않고 선두에 서서 지휘하였다. 김시민은 때로는 울면서 부하들에게, “온 나라가 함몰되어 보존해 남은 데가 적다. 지금 이 한개 성에 나라의 명맥이 달려있다. 이 성마저 함락된다면 우리나라는 끝장이다. 우리가 성을 보전하지 못하면 성중에 있는 사람은 모두 다 왜놈 칼날 아래 귀신이 되고 말 것이다. ‘죽을 땅에 빠진 뒤에 살 계책이 생긴다’는 옛말을 명심하라!”고 하소연하였다. 이에 군민은 감격하여 결사적으로 싸웠다. 일본 군사들이 성위을 향하여 총을 격렬하게 쏘아댔다. 김시민은 부하들에게 풀로 인형을 많이 만들어서 성위로 올렸다 내렸다 하게 하였다. 왜병들이 사람인줄 알고 집중적으로 총을 쏘니 총알만 허비할 뿐이었다. 김시민은 왜병들이 접근하면 화살을 아껴 돌을 던지게 하였다. 다시 어두워져 전투가 멈추었다. 밤이 되자 성밖 조선 의병이 남강 건너편에 나타나 횃불을 올려 수비군을 응원하였다. 왜군 지휘부는 담장 같은 진주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진주성 외곽에 분산되어 있는 지원부대들 때문이라고 판단하였다. 9일 왜군은 공격군을 다수의 소부대로 나누어 편성한 다음 진주성 외곽에 있는 조선군 지원부대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이러한 병력 분산 작전은 전력을 약화시켜 의병부대들에게 유리한 결과만 가져다주어서 일본부대는 의병장 김준민 등의 부대에게 격퇴되어 큰 손실을 입었다. 전라도 의병장 최경회 등 부대도 성 멀리 나타나서 성안 수비군과 호응하고 왜군을 압박하였다. 왜군은 공성작전을 바꾸었다. 대나무 다발과 연결 사다리를 많이 준비한 다음, 토성을 쌓고 누대를 세워 한 부대가 그 위에서 총을 성안으로 쏘아대는 동안 나머지 부대가 대나무 다발을 방패로 하여 사다리를 들고 성으로 접근하였다. 성위에서는 침착하게 대포를 쏘아 대나무 다발을 박살내며 왜병들을 죽이고 토성의 누대로 대포를 쏘아 그 위의 군사들도 죽였다. 큰 피해를 입은 왜군은 감히 다시 누대 위로 올라가지 못하였고 공성부대는 철수하였다. 왜군 장수들은 공성에 계속 실패하자 계략을 써서 성안 수비군을 밖으로 유인해 내기로 하였다. 밤에 여기저기 모닥불을 피워 어둠을 환하게 밝혀놓고는 군막을 철거하고 모든 자재들을 수레에 실었다. 철수하는 적군을 추격하는 것은 전술의 요체이다. 왜군은 거짓으로 철수하는 것처럼 하여 성안의 군을 밖으로 끌어내려는 것이었다. 왜군에게 잡혀 있던 조선 한 아이가 탈출하여 성문으로 달려갔다. 성안에서 문을 열어 들어오게 하여서 적의 실정을 물으니, “내일 새벽에 총공격을 한답니다”고 알려주었다. 이에 김시민은 왜군의 유인전술에 넘어가지 않고 성 수비 준비를 더욱 착실히 하였다. 일본 군사들은 한 밤중에 각 막사에 불을 밝혀놓고 짐을 싣고 거짓으로 퇴각하는 체 하는데 추격군이 없자 불을 끄고 가만히 진주성으로 돌아왔다. 진주성 군사들이 적군이 물러가는 것을 보고 한숨을 놓아 잠이 들었는지 성안이 고요하였다. 왜병들은 ‘기회다’하고 사다리를 타고 성위로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갑자기 함성이 천지를 진동시키며 성위에서 숨어서 대기하고 있던 수비 군사들이 아래로 화살과 돌 세례를 하였다. 사다리를 올라가던 왜병들 태반이 성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 그러나 왜군 지휘부는 이제 사생결판을 내려는지 이진, 삼진, 사진 부대를 계속 출동시켰다. 성벽을 사이에 두고 아비규환의 사투가 밤새도록 벌어졌다. 사투중에 한 떼의 일본 군사들이 이윽고 긴사다리를 이용해 성벽을 넘었다. 성을 지키는 군사들이 놀라고 당황하여, 수비군 전열이 무너졌다. 전 만호 최덕양, 군관 이납과 윤총복 등만이 나서서 죽음을 무릅쓰고 막아 싸웠다. 그러자 달아났던 성안 병사들도 다시 돌아와 싸웠다. 백성들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나서 일본 군사들에게 돌을 던지고 지붕으로 올라가 기왓장을 던졌다. 성안으로 들어온 일본 군사들은 마침내 당해내지 못하고 성밖으로 달아났다. 새벽이 열리고 있었다. 왜군의 사상자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일본 수뇌진은 더 이상의 공성은 전군의 붕괴를 의미한다는 것을 절감하여 철수 명령을 내렸다. 아침이 되었다. 그러나 짙은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어 밤처럼 어두웠다. 천둥과 번개가 치더니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오전 열한시 쯤 왜병들은 썰물같이 빠져나가고 진주성 안팎은 지옥의 참상이 되어 있었다. 김시민은 진두지휘하다가 적탄을 이마에 맞아 정신을 잃고 있었다. 왜병들은 황망히 철수하고 있었다. 추격하면 크게 무찌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주장 김시민이 정신을 잃고 있어서 추격전을 벌일 수가 없었다. 그는 상처가 낫지 않아 결국 일어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김시민은 마지막 순간까지 나라일 만을 생각하며 때때로 머리를 들고 북쪽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는 이제 왜군에게 공포의 인물이었다. 성안에서는 적이 김목사의 죽음을 알까 겁이 나서 상(喪)을 치르지 않았다. 그러나 성 안팎 사람들은 부모의 상을 치르는 것처럼 며칠을 곡하였으며 일년이 넘도록 소찬만 먹었다. 이 전투는 임진왜란 조선군의 첫 대첩이었다. 한산도 전투는 히데요시의 대륙정복 기도를 무산시켰다. 그러나 그 전투는 비록 세계사적인 의의가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대전투라고까지는 할 수가 없었다. 왜군은 칠년전쟁 중 삼천여 척의 배를 동원하였다. 한산도 전투에서 그들이 잃은 배는 육십여 척에 불과하였다. 그것은 새 발의 피 같은 것이었다. 또 전투가 연안에서 벌어진 탓으로 배가 파손되면 배위의 왜병들은 뭍이나 섬으로 도망칠 수가 있어 사상자도 많지 않았다. 한산도 전투는 대전투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진주성 전투의 왜군 희생자 수는 얼마나 될까. 후일 일본은 명과 강화회담 때, “진주성 전투에서 장수의 사망자가 삼백 명, 군병의 사망자가 삼만 명이었다”고 말하였다. 어느 정도 과장된 표현이지만 그 전투의 피해와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 수가 있다. 우리는 보통 이순신이 임진왜란 때 일본의 군관민에게 널리 알려졌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임진칠년전쟁중 이순신은 일본인들에게 무명의 인물이었다고 한다. 일본 땅의 어린아이들도 알만큼 명성을 떨친 조선 장수는 김시민 한 사람 뿐이었다고 한다. 히데요시의 대륙정복 야망을 무너뜨린 전투는 진주성 양차 전투였다. 어째서인가. 왜군 수뇌부는 이순신 수군에게 십 차례 이상 싸워 패하면서도 진정으로 패했다고 여기지 않았다. 왜군은 조선 수군, 의병들의 활약으로 인력과 군수품 보급이 여의치 않아 난관에 봉착해 전력이 급속히 약화되었지만 여전히 우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혹자는 왜군은 개전 초기 몇 달간만 우세했고 내내 수세로 몰렸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들의 수세는 전술적인 것이었을 뿐이다. 왜군이 진정으로 수세로 몰린 것은 바로 이 진주성 패전 뒤부터였다. 왜군이 수십 차례에 걸쳐 패하기는 했지만 바다의 한산도 패전이고 육지의 무슨 패전이고 간에 사상자는 많지 않았다. 그들은 그때까지 수십 차례 패하면서도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진주성 전투에서만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진주성 전투 이후 전국의 흐름이 바뀌었다. 이 전투는 실로 임진왜란 승패의 분기점이었다고 평가할 수가 있다. *출처-<이순신과 도요토미 히데요시(경향미디어 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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