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수필

소박한 풍요로움

청비바리 2010. 4. 9. 01:05

 

 


    올해 추석은 유난히 바쁜 가운데 맞이했다.

연휴기간이 짧은데다 도배와 제사, 그리고 큰언니 수술까지 연이어 겹쳐서 숨돌릴

겨를이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날씨는 왜 그렇게 더웠는지, 일보다 더위에 지쳐 진이

빠진 듯 했다.

  어린시절의 추석 명절은 언제나 기대와 즐거움으로 다가왔다. 어머니가 사주신

새 옷을 입고 평소에는 구경하기도 힘들었던 하얀 쌀밥과 갖가지 맛있는 음식들을

실컷 먹을 수 있는, 1년중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  ‘곤밥’1)이라고 했던 하얀 쌀밥이

그때는 왜 그렇게 달고 맛있었는지 곤밥이 먹고 싶어서 명절이 기다려지곤 했던 것

같다. 어른이 된 지금은 그런 추석의 즐거움이 옷과 음식이 아닌 만남의 즐거움으로

바뀌었다. 서울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남동생이 명절을 지내기 위해 내려오고,

오랜만에 대하는 친척들의 얼굴이 반갑기 그지없다. 차례음식을 만드는 내내

어머니와 친척 어른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가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내가 하는

일이래야 전을 부칠때 밀가루 묻히고 과일 닦고, 음식을 나르는 잔심부름 정도지만

차례가 끝나고 나면  온몸이 노곤해진다. 그러니 그 큰일을 몇 차례나 당신 손으로

도맡아 치르시는 어머니는 오죽 힘드실까? 그래서 어머니 앞에서는 피곤하다는 말을

꺼내는 것 조차 죄송스럽다.

  내 나이가 벌써 서른이 넘어 집에서 하는 일도 없이 지내는 처지이고 보니 나보다

한참 어린 사촌 동생들이 결혼해서 아이 하나 둘씩 안고 업고 올때면 그리 좋은

기분만은 아니다. 부러운건 아니지만 왠지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드는게 사실이다.

명함에 넣을 직함이라도 있으면 좀 나으련만, 직장도 없는 노처녀 신세로 명절을

보내기란 그리 유쾌하지않은 점도 많이 있다. 다행스럽게도 내 경우엔 아직 결혼이나

취업 스트레스에 시달리지는 않으니 이점에 있어서는 정말 부모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차례를 지낸 후 뒷 정리까지 다하고 나서야 어머니와 나는 늦은 음복을 한다.

완전히 땅거미가 진 후에야 제주시에서 넘어온 큰언니 식구들이 도착했다. 언니가

수술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추석을 지내는 것이 걱정이었는데, 다행히 언니 얼굴이

그다지 나빠 보이지 않아 안심이 되었다. 초등학교 1학년인 조카는 외할머니에게 붙어서 떨어질 줄 모른다. 엊그제 만났었는데도 이산가족 상봉을 방불케한다.

  추석날 저녁, 떨어져 지내던 식구들이 한데 모여 오순도순 정겹게 보내는 행복한

그 순간은 먹지않아도 배부르다. 명절의 풍요로움 그 자체이다. 내년에는

지금보다는 조금 더 당당한 모습으로 추석을 맞이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소박한

내 바람이다. 

   

     


 

1) 곤밥-쌀밥을 이르는 제주 방언.

 

                                                                                     -200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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