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속의 편지
오현진
letter 1. 가슴을 적시는 첫사랑- J
가을 햇살을 닮은 미소를 지닌 한 남자가 있습니다.
질풍노도의 사춘기에 아련한 첫사랑의 설렘을 가슴에 담았습니다.
여리고 눈물 많은 열 네 살 소녀의 감성을 흔들어 놓은 그는 나만의 왕자님이었고
친구였으며 자상한 오빠와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때로는 그리움에 잠 못이루고
가슴앓이도 했었지요. 늦은 가을 오후엔 엷은 햇살이 스며드는 창가에서 그와
마주 앉아 차를 마시며 도란 도란 이야기를 나누고도 싶었고, 함께 손을 잡고 낙엽이
쌓인 길을 걸으며 가을 정취를 즐기고도 싶었습니다. 첫눈 내리는 날, 아무도 밟지 않은
순백의 눈을 둘이서 ‘뽀드득, 뽀드득’ 소리나게 밟으며 웃음짓는 상상을 하는것도
즐거웠지요. 하지만, 현실에서는 늘 그를 멀리서 바라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요, 난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짝사랑인것을요.
한동안은 그에 대한 짝사랑의 기억을 잊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었지요. 세월이 흐르면
나 자신도 모르는 새에 잊혀질 거라고 여겼습니다. 이제 그는 불혹을 넘긴 중년의 나이가
되었고, 지난 날 짝사랑의 감정은 존경과 흠모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미소는
여전히 스무살의 젊음으로 빛나며 여전히 내 가슴을 설레게 하고 있습니다.
짝사랑이면 어떤가요?
비록 홀로 하는 외로운 사랑이지만 늘 그의 좋은 모습만 기억하고 그를 연모했던 그 시절의
순수를 기억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letter 2. 하늘만큼 땅 만큼- 거스 아저씨
2002년 뜨겁던 유월의 밤, 그날의 감동을 저는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마침내 그토록 염원했던 꿈을 이룬 기쁨의 세레모니로 어퍼컷을 날리며 환호하던 당신의
모습이 여전히 눈에 선한데, 당신은 지금 우리 곁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최고의 선물을 선사하고
“So long~(다시 보자)!”라는 말을 남긴 채 떠난 당신.
하지만, 당신의 변함없는 사랑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뉴스를 보니 유로 2008 대회에서 당신이 맡고 있는 러시아 대표팀을 4강에
올려놓았더군요. 모국 네덜란드를 누르고 또다시 예상치 못했던 기적을 일궈낸 당신을
보며 감회에 젖었습니다.
당신과 함께 했던 2002년의 추억이 꿈만 같이 아득하게 느껴지네요. 당신이 그립습니다.
축구공 하나에 울고 웃으며 활화산 같은 열정으로 달아 올랐던 그 해 여름, 그날의 함성이
그리워집니다. 한국이 당신 가슴속에 있듯 당신은 우리의 가슴속 깊이 뜨거운 감동으로
남아 있습니다.
당신은 자신이 영웅이 아닌 그저 축구 감독일 뿐이라고 손사레를 칩니다. 그러나, 당신은
누가 뭐라 해도 우리의 영웅입니다.
사랑해요, 거스 아저씨! 그리고, 고마워요. 하늘만큼 땅 만큼!
letter 3. 불멸의 열정- 민
눈 내리는 밤, 따뜻한 벽난로 불을 쬐며 블루 마운틴을 함께 마시고 싶은 남자가 있습니다.
서른 일곱. 반듯하고 지적이며 성공한 남자. 도회적이고 세련된 이미지의 그는 누구라도
한 번쯤 눈길을 줄 만큼 매력적입니다. 나와 같은 나이지만 어쩐지 함부로 말을 놓아선
안 될 것 같은 범접할 수 없는 위엄마저 느껴집니다.
그에겐 꽃보다 아름다운 미소뒤에 감춰진 상처투성이 영혼을 위로해 주고 싶은 연민이
느껴지기도 하고 인간적인 고뇌와 아픔을 애민(愛民)과 애국(愛國)으로 승화시킨
불멸의 성웅으로서의 모습도 보입니다. 그리고, 불량기가 다분하지만 정이 넘치는 건달도
되었다가 성공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야심찬 외과의사로 변모하기도 했지요.
그는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할 때 마다 완전히 그 인물에 동화되어 몰입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럴때 마다 헤어나올 수 없는 그의 매력에 갇혀 버리곤 하지요. 때로는 그 만의
아우라에 압도되어 감히 가까이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지만, 그런 그도 일상에서는 보통
사람과 다름 없습니다. 한 번쯤 찾아가면 반갑게 웃으며 맞이해 줄 것 같고, 고민을
털어놓으면 조근 조근 다독이며 조언해 줄 것 같은 친구같이 편안하고 친근한 그입니다.
오늘 밤은 그와 함께 창 유리를 두드리는 비소리를 감상하며 블루 마운틴 향기에
젖어 보고 싶네요.
letter 4. 넌 어느 별에서 왔니 - 환
널 처음 본 건 2년전 겨울이었지.
연말의 들 뜬 분위기가 무르익어 갔지만, 난 언제나 그렇듯 혼자서 쓸쓸히 연말을
보내고 있었어. 그런 내게 정말 꿈결같이 네가 다가온거야.
한국에서 연말 분위기가 한창일 때 넌 머나면 타국 땅 도하에서 힘차게 금빛 물살을
갈랐고, 길고 긴 겨울밤을 뜬 눈으로 지새우며 널 응원하던 나는 환호하고 박수를 보냈지.
유리알처럼 부서지는 물결 속에 솟구치는 네 모습은 날렵한 한 마리의 돌고래처럼 힘이
넘쳤고 거침 없었어. 네 눈부신 젊음과 당당함에 난 그만 반해버렸지.
그런데, 경기를 끝내고나서 물 밖으로 나오는 널 본 순간 너무나 앳되고 고운 네 얼굴에
또 한 번 반하고 만거야.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수줍게 관중들의 환호에 답하는 너는
영락없는 십대 소년의 순수함 그대로였어.
봄 볕처럼 화사한 미소와 수영으로 다져진 환상적인 몸매, 순수하고 고운 심성을 지닌
네게 난 완전히 빠져버렸어. 일상에 지쳐 마음이 번잡하거나 우울하다가도 널 보면
마냥 흐뭇하고 행복해진단다.
이제 올림픽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이미 작년 멜버른 세계선수권대회와 지바국제수영대회에서 잇달아 우승하면서
‘자유형에서 세계를 제패한 유일한 동양인’이 된 너이지만, 올림픽은 네게
또다른 도전이고 이뤄야할 꿈인 것을 알고 있어. 쉽지는 않겠지. 하지만 난 네가
해낼 수 있을 거라 믿어. 올림픽을 위해 혹독한 훈련을 감내하고 있을 널 생각하면
안쓰럽기도 하고, 주위의 관심과 기대 때문에 부담을 가지지는 않을까 걱정되기도 해.
사실 난 네가 불모지나 다름없던 수영에서 올림픽 메달의 희망을 가질 수 있게 해준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하고 대견한지 몰라.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어.
어떻게 네가 우리에게 와서 생각지도 못했던 기쁨과 행복을 안겨주는지 말이야.
넌 정녕 하늘에서 보내준 선물인가 보다.
환아, 넌 대체 어느 별에서 왔니?
-2008. 6.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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