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수필

운명을 가른 작은 공

청비바리 2010. 4. 9. 03:22

 

               

 




  지난 금요일 밤, 잠자리에 들기전에 휴대전화 알람을 맞추면서 잠시 고민에 빠졌다.

항상 토요일 아침에 성체조배를 하기 때문에 여섯시 정각에 일어날 수 있도록 시간을 맞추어 놓곤 했는데 시간을 좀 더 앞당길까 말까하며 망설인 것이다.

바로 토요일 새벽에 있을 독일 월드컵 본선 조추첨때문이었다. 특히나 이번은 한국이 4강신화의 후광으로 인해 역대 월드컵 사상 가장 유리한 입장에서 조배정을 받게 되어서 어느때 보다도 기대가 되고 기다려졌다. 또한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호주와 조별예선에서 만나게 될 것인지 여부도 달려있었기 때문에 생중계로 보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일었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새벽 4시로 알람을 맞추고 잠을 청했다. 우리 한국팀이 제발 약한 팀을 만나게 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알람은 정확하게 시간에 맞춰 울렸지만 역시 호락호락하게 일어날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눈도 뜨지 않은 채 반사적으로 휴대전화를 집어들고 알람을 멈추어 놓고는 다시 침대위에 널부러지고 말았다. 그렇게 얼마나 잤을까. 세상 모르게 자다가 거실에서 들려오는 텔레비젼 소리에 문득 잠이 깼다. 뉴스를 전하는 아나운서의 흥분된 듯한 목소리가 방문 틈새를 비집고 들려왔다. 비몽사몽간에 들어서 그런지 말소리가 자꾸 끊어졌다가 다시 드문 드문 들려오곤 했는데, 얼핏 짐작하기에 조추첨에 관한 보도인듯 했다. 간간이 들려오는 말 중에 ‘프랑스’ 만이 귓가에 맴돌았다. 잠결에 들으면서도 속으로 ‘아뿔싸!’했다. 졸린 눈을 억지로 비벼가며 시간을 확인해 보니 벌써 일곱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주저없이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조추첨 결과도 궁금하고 성체조배에도 늦어지게 되어서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뉴스에서는 새벽에 벌어진 조추첨 결과를 몇 차례나 반복해서 보도했다. 한국은 프랑스와 스위스, 그리고 토고와 함께 G조에 편성되었다고 전하는 아나운서의 얼굴이 상기되어있었다. 인터뷰에 응한 전문가들은 세 팀 모두 결코 만만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다른 조에 비하면 무난한 편이라면서 16강 진출을 낙관했다. 내 생각에도 한국이 속한 조가 비교적 무난해 보였다. 2002년에 이어 두 대회 연속 죽음의 조에 편성된 아르헨티나에 비한다면 정말 다행이지 싶다. 아르헨티나여, 독일 월드컵에서는 부디 울지마오.

초미의 관심사였던 히딩크 감독의 호주는 F조의 브라질, 일본, 크로아티아와 맞붙게 되었다.혹시나 조별예선에서 호주와 맞닥드리게 되면 어쩌나하고 노심초사했는데 천만다행이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조추첨 과정을 지켜보던 붉은악마들이 G조 추첨에서 한국이 불려지는 순간 마치 한국팀이 16강에라도 간 것 마냥 환호하며 기뻐하는 장면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도 따라 생중계를 보는 것 같이 긴장되고 흥분되었다. 아시아와 북중미팀이 속해있는 4그룹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한국과 일본. 투명한 반원형의 통 안에는 두 나라의 운명을 결정지을 두개의 작은 공이 선택되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추첨자로 나선 독일의 축구영웅 마테우스의 손에 의해 마침내 두개의 공은 운명이 엇갈리게 되었다. 마테우스가 진행자에게 넘겨준 공 안에는 ‘the Republic of Korea’가 들어있었다. 월드컵 경기 만큼이나 드라마틱한 순간이었다. 그 작은 공 하나가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대한민국을 들었다놓았다 한 것이다.

이제 맞서 싸울 상대는 가려졌다. 저 꿈의 무대에서 우리의 실력을 입증할 기회가 다가오고 있다. 우리는 아시아의 자부심, 아시아의 챔피언이다. 세계의 강호들과 당당히 겨루어 월드컵 4강의 업적이 운이라고 비웃는 이들에게 우리의 정당한 실력으로 이룬 것임을 확실하게 각인시켜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니, 꼭 그렇게 될 것이라 믿는다. 뜨거운 열정의 축제가 펼쳐질 내년 여름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린다.

 

                                                                  -2005. 1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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