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못할 세부여행
잊지 못할 세부 여행
오현진
난생 처음 해외여행을 했다.
아버지 칠순을 맞이하여 추석연휴때 필리핀 세부로 가족여행을 떠났다. 남동생이 해외로 가족여행을 가자고 제안했을때
어머니의 반대가 심했다. 여행 경비도 그렇거니와 14명이나 되는 대식구가 한꺼번에 움직이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도 선뜻 내켜하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국내에도 여행할 곳이 많고 하다못해 제주도 일주 여행을 해도
충분한데 아이들까지 데리고 그 많은 식구가 어떻게 해외여행을 가냐고 하면서 반대하셨지만, 동생의 끈질긴 설득에 결국
마음을 바꾸셨다. 추석에 집에 내려온 동생과 올케는 여행일정을 설명해주며 부모님을 안심시키고 여행준비를 도왔다.
명절을 지내자마자 여행준비를 하느라 경황이 없었지만 첫 해외여행에 대한 설렘과 기대로 피곤함을 잊을 수 있었다.
연휴 마지막날 아침, 동생네와 함께 공항으로 향했다. 제주공항에서 큰언니와 조카를 만나 합류했다. 큰형부는 일 때문에
바빠서 가족여행에 함께 하지 못했다. 형부는 언니와 조카를 공항까지 데려다주는 길에 우리를 배웅하고 아쉬움을
뒤로하며 공항을 나섰다. 비행기 탑승 시간까지 여유가 있어 공항 면세점에서 쇼핑을 했다. 서울행 비행기에 탑승하자
머리가 조금 아팠지만 견딜만했다. 컨디션은 염려했던 것 보다 괜찮다.
서울에 도착한 후 세부행 비행기 출발시간이 밤 9시라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기 때문에 동생네 집에서 쉬기로 했다.
동생네가 사는 아파트에 이르자 점심때가 되었다. 동생네 집에서 점심을 먹고 쉬다가 저녁 6시쯤에 인천국제공항으로
출발했다. 인천공항에서 작은언니네 식구들과 합류하기로 했는데, 공항에 도착해보니 작은언니와 형부, 그리고 조카들이
먼저 와 있었다. 오랜만에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여 회포를 풀면서 가족해외여행에 대한 기대와 흥분으로 들떴다.
티켓팅을 한 후 햄버거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출국수속을 했다. 마침내 세부행 비행기에 탑승하기 위해 탑승구로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이제 비로소 세부에 간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설렜다. 내 인생에 있어서 처음으로 떠나는 해외여행의 첫 여정.
책이나 TV를 통해서만 접할 수 있었던 세부, 그 곳으로 간다. 과연 어떤 곳일까.
세부(Cebu) 섬은 필리핀의 한가운데 자리잡은 길이 196km, 너비 32km의 섬으로, 북쪽으로 비사얀해, 서쪽으로 타논해협,
남동쪽으로 보흘 해협, 동쪽으로 카모테스 해에 면해 있다. 세부섬외에 북동쪽의 카모테스 섬, 동쪽의 막탄 섬, 북서쪽의
반타얀 섬을 포함한 세부군은 필리핀에서 가장 인구가 밀집되어 있는 군으로, 행정중심지인 세부시티 외에도 다나오,
라푸라푸(옛 이름은 오폰), 톨레도, 만다웨 등의 자치시와 릴로단, 달라게테, 투부란, 두만후그가 주요도시로 손꼽힌다.
세부시티, 보고, 만다웨, 라푸라푸(막탄 섬), 다나오가 세부군의 주요항구들이다. 주요어항으로는 탈리사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세부 리조트”는 막탄 섬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고, 외국인 이민자도 많다.
우리 가족이 머물 리조트가 있는 막탄 섬(Mactan Island)은 필리핀 중부 세부 주에 있는 섬으로, 세부 동해안과 세부시의
앞바다 불과 몇 킬로 떨어진 곳에 있다. 세부 본섬과는 막탄섬의 만다우에와 마르셀 페낭, 2개의 다리와 연결되어 있으며
섬 중앙 부분은 세부와 국내외의 많은 도시를 연결하는 필리핀 제2의 막탄 세부 국제공항이 있다. 공항에서 세부시내까지는
차로 30~40분, 비치 리조트에서 20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는다. 막탄섬은 풍광이 다름다운 산호섬으로 다이빙,스노클링,
아일랜드 호핑투어, 젯스키, 세일링 등 최적의 수상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필리핀은 우리나라와 1시간의 시차가 있다. 네시간의 비행 끝에 현지 시간으로 새벽 1시, 한국시간으로는 12시 25분경에
막탄 공항에 도착했다.드디어 생애 처음으로 이국 땅을 밟는 순간이었다. 어슴프레한 불빛속에 모습을 드러낸 막탄 공항은
비에 젖어 있었다. 활주로 군데 군데 물이 고여 있는 곳도 보였다. 필리핀은 9월~12월까지 우기이다. 필리핀의 우기는
우리나라의 겨울과 같다고 하는데 지금 우리 가족이 여행하는 9,10월이 여행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라고 한다. 비행기에서
내려 활주로에 발을 내디뎠을때 축축하고 습한 공기가 몸을 감쌌다. 우리나라의 장마철 같은 느낌이었다. 공항 건물 안에
들어서자 마치 오래된 창고 안 같은 분위기에 눅눅하고 비릿한 냄새가 공기에 섞여 다가왔다. 새벽 1시 11분쯤 입국수속을
하고 짐을 찾아 챙겼다. 우리가족 말고도 여행온 한국 관광객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입국수속을 위해 길게 늘어선 줄의
대부분이 한국 관광객이었다. 유럽이나 미주지역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외국관광객들도 몇 몇 눈에 띄었으나 극소수였다.
입국수속할 때 언어 문제 때문에 다소 걱정을 했지만 미국 연수를 다녀온올케와, 잦은 해외출장으로외국 여러나라를
제 집 드나들 듯 하는 동생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통과할 수 있었다. 짐을 찾아 공항 로비에 이르자 우리가 머물 리조트
에서 보낸 무료왕복 셔틀버스 기사가 예약 상황을 확인하고 우리 가족을 셔틀버스로 안내했다. 셔틀버스에 모두 올라타서
출발하기만을 기다리는데, 왠일인지 버스가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 가족만 타고 가는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잠시후, 셔틀버스 기사가 한국인 관광객 4명을 더 태웠다. 더 이상 앉을 자리가 없이 좌석이 다 찬 후에야 마침내 차가
출발했다.리조트를 향해 가는 동안 막탄 시내 거리를 지나는데, 새벽인데도 가게마다 불을 밝히고 있었다. 거리에
사람들도 많이 보였지만 그리 활기차 보이지는 않았다. 버스안에는 라디오에서 필리핀 가요인 듯한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감미롭고 부드러운 멜로디가 감성에 젖게 한다. 새벽 2시 무렵 숙소인 플랜테이션 베이에
도착했다. 로비에서 체크인을하고 방을 배정받았다. 동생과 올케가 체크인을 하는 동안 로비를 둘러보며 구경했다. 로비는
넓고 깨끗하고 쾌적했으며 고풍스러웠다. 이국적인 분위기의 로비를 구경하면서 비로소 외국에 왔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체크인을 마친 후 카트에 나눠타고 숙소로 향했다. 우리가족이 머물 숙소 동의 담당 직원들이 짐들을 카트에 실어
날라서 방 앞에까지 가져다 주었다. 부모님과 내가 함께 지낼 방은 넓고 쾌적하고 단정한 분위기였고 발코니에서 수영장이
한눈에 내려다 보일 정도로 전망이 좋았다. 세부에서의 첫날 밤, 아니 첫 새벽이라고 해야 맞겠다. 너무 피곤해서 대충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 시계가 없어 시간을 확인하지 못했지만 아마 짐작하기에 새벽 4~5시쯤 된 것 같다. 몇시간 후면
맞이할 세부의 첫 아침을 기대하며 잠을 청했다.
세부에서의 첫날 아침. 블라인드 사이로 빗겨드는 햇살이 눈부시다. 아침에 샤워를 하니 기분이 새롭다.
창 밖 발코니에서 내려다보이는 수영장과 인공 비치의 물빛이 햇빛에 반사되서 보석처럼 반짝인다. 오늘은 아버지의
칠순 생신이다. 칠순 생신 파티는 저녁에 현지 식당에서 할 예정이다. 아침식사를 하러 가기 위해 준비하는데 누군가
방문을 노크했다. 아버지가 방문을 열었는데 버틀러가 조그만 케익을 들고 와서 생일축하 인사를 했다. 버틀러는 숙소
동 담당 직원을 이르는 직함이다. 아버지 생신 축하 선물로 보낸 호텔 측의 서비스였다. 겉보기에 맛있어 보여서 조금
맛을 보았는데 이른 아침에 빈속에 먹으니 속이 약간 느글거렸다. 식구들이 모여서 함께 아침식사하러 가야 하기
때문에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 동생네와 작은언니네 식구들도 때 맞춰 나와 카트를 기다렸다. 큰언니와
큰조카가 제일 마지막에 3층방에서 내려왔다. 숙소 앞에서 카트를 타고 리조트내에 있는 조식당 킬리만자로 카페로
향했다. 킬리만자로 카페는 아침식사 뷔페가 제공되는 식당으로, 평소에 접하기 어려운 세계 각국의 요리와 필리핀
현지요리를 먹어 볼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은 야외 테이블에서 식사를했는데 식당이 민물 수영장으로 둘러싸여 있어
식당 바닥 밑으로 흐르는 물 속에서 떼지어 헤엄쳐다니는 물고기들을 볼 수 있고 바깥 경치를 보며 여유있게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음식 맛은 대체적으로 달고 짜고 시큼했는데 그래도 생각보다는 입맛에 맞았다. 고기요리를 먹다 보니
느끼해서 샐러드 바에 갔다가 김치가 있길래 반가워서 접시에 듬뿍 떠서 가져와 먹었는데 김치가 맵지 않고 시큼했다.
시큼한 맛이 발효시켜서 구수한 신맛이 아니라 식초에 절인 듯한 맛이었다. 아마 필리핀 현지인들의 입맛에 맞춰서 만든
것 같다. 그래도 거부감이 들 정도는 아니었고 먹을 만 했다. 빵을 워낙 좋아해서 빵도 종류별로 가져다 먹고 국내에서는
비싸서 먹기 힘든 망고를 비롯한 열대과일들을 잔뜩 가져와서 실컷 먹었다. 특히 조카들은 망고를 좋아해서 과일이나
음료수를 주문할 때 항상 망고와 망고주스는 조카들의 차지였다. 식당 밖이 바로 수영장과 인접해 있어서 사람들이
수영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벌써 수영장에 있는 사람들은 대체 아침밥은 언제 먹고 수영을 하는
건지 궁금하고 신기했다. 아침식사 후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수영장으로 갔다. 수영장이 가까워서 걸어서 5분정도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었다. 세부의 강한 햇살이 염려되어 자외선 차단 크림을 바르고 작은언니가 사준 비치 가운을 수영복 위에
걸쳐 입었다. 선글라스와 모자, 워터슈즈까지 챙겨서 수영장으로 왔는데 우기여서 그런지 예상했던 것 보다 햇살의 열기가
강하지 않았다. 조카들은 수영장에서 마치 제 세상인듯 신나게 즐겼다. 어머니와 아버지도 수영을 잘하시는 편이라 손자
손녀들과 함께 수영을 즐기며 줄거운 시간을 보냈다. 작은언니는 늦둥이 막내딸과 놀아주느라 여념이 없고, 큰언니는 비치
의자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수영을 할 줄 몰라 물 속에서 걸어만 다녔는데 조카들이 입었던 구명조끼를 빌려
입고 물에 몸을 맡겼더니 별세계가 펼쳐졌다. 물에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 마치 진짜 수영하는 기분이 들어 짜릿했다.
온갖 영법을 다해보며 물놀이를 만끽했다. 그러다 지쳐서 물위에 드러누워 쉬며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부드럽게 반짝였다. 세부의 빛나는 햇살아래 여유를 즐기는 이 순간이 그저 꿈만 같아 황홀하다.
점심때가 되자 리조트내의 레스토랑에서 햄버거로 간단하게 점심식사를 하고 모감보 스파에서 온천욕으로 피로를
풀었다. 무성한 열대나무로 둘러싸여 있는 18세기 일본 전통양식의 모감보 스파는 온천욕뿐만이 아니라 사우나와
마사지도 받을 수 있고 온천욕후에 비치 베드에 누워 휴식을 취할 수 도 있었다. 온천욕 후 저녁까지 방에서 쉬었다.
발에 너무 꽉 끼어 아파서 신을 수 없었던 워터슈즈대신 호텔 서비스로 제공되는 조리로 바꿔 신었다. 엄지발가락
사이가 좀 아프긴 했지만 워터슈즈보다는 한 결 나았다. 오른발은 괜찮았지만 다쳤던 왼발이 볼이 조여서 압박이
가해지자 아파서 워터슈즈를 신기가 힘들었다. 저녁식사는 외부의 현지식당에서 하기로 했다. 6시쯤에 로비에
모여서 리조트에서 제공하는 셔틀버스를 타고 식당으로 향했다. 버스 차창 밖으로 노을에 물든 하늘이 보였다.
세부에서 보는 첫 노을이었다. 세부의 하늘을 불태워버릴 듯 온통 붉게 퍼지는 노을을 보니 가슴이 터질 듯 흥분
되었다. 그렇게 저물어가는 노을을 뒤로 하고 버스는 막탄 시내로 들어섰다. 가게마다 불을 밝히고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조도가 낮아서 진열된 물건이 제대로 구분이 안될만큼 어두웠다. 거리에는 가로등도 없었다. 필리핀의
독특한 교통수단인 트라이시클들이 우리가 탄 버스를 지나쳐간다. 한참을 달려 저녁을 먹을 해산물 식당 오이스터
베이에 도착했다. 바닷가에 접해있는 식당은 야경이 아름다웠다. 야외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주문하고 케익을 꺼내
아버지 생신 파티를 준비했다. 종업원들이 와서 생일축하노래를 불러주었다. 온가족이 한마음으로 박수를 치고 노래를
같이 부르며 아버지의 칠순을 축하했다. 신선한 해산물 요리가 주 메뉴인저녁식사는 정말 맛있었다. 배부르게 먹었는데도
양이 너무 많아서 많이 남기고 온 것이 못내 아쉽다. 저녁식사후 다시 셔틀버스를 타고 리조트로 돌아왔다. 씻고 잠자리에
들려는데 조카들이 방으로 찾아왔다. 동생의 두 아들인 호준이와 희준이었다. 올해 7살, 4살인 두 꼬마 형제가 할아버지
방에서 컵라면을 끓여먹겠다고 찾아온 것이었다. 어머니가 커피포트에 물을 끓여 컵라면에 물을 부으면서 내게 발코니에
불을 켜고 아이들이 테이블에서 먹을 수 있게 도와주라고 하셨다. 어머니와 함께 발코니 테이블에 컵라면을 갖다 주자
조카들은 사이좋게 마주 앉아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호준이가 먼저 다 먹고 혼자 자기네 방으로 돌아갔다. 형이 자리를
뜬 후에도 희준이는 아랑곳 하지 않고 한참 동안 종알거리며 먹다가 나한테 먹어 보라고 권했다.
“고모도 먹어볼래요?”
그러나 이미 배도 부르거니와 양치질을 한 후라 먹을 수 없어 거절했다. 희준이가 라면을 다 먹고 일어서자 어머니가
희준이를 동생네 방에 데려다 주고 오라고 했다. 희준이를 데려다주고 와서 비로소 침대에 누울 수 있었다. 세부에서의
첫날 밤이 저물어간다. 내일은 어떤 하루가 펼쳐질까.
세부에서의 둘째날 아침이 밝아왔다. 오늘은 카트를 타지 않고 킬리만자로 식당까지 걸어서 갔다.
아침식사를 한 후 호핑투어를 하기 위해 지프니를 타고 바닷가로 향했다. 노란색 지프니에 올라타서 자리에 앉을때 차
지붕이 낮아서 머리를 부딪힐 뻔 했다. 지프니는 작은 트럭같이 생겼는데 창문이 없고 양 옆으로 뚫려 있어서 밖을 내다
볼 수 있었다. 머리 위에 설치된 바를 붙잡고 머리를 바깥쪽으로 내미니 다소 위험하긴 해도 앉아있기가 좀 수월했다.
낮에 보는 시내의 거리는 밤에 봤을때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마치 우리나라의 60~70년대 모습 같았다.
트라이시클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고 어린학생들도 많이 보였다. 한글 간판도 눈에 많이 띄었다. 가게의 상인들은
여유롭고 한가해 보이는데 트라이 시클 기사들만 바쁘고 부지런하게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다. 지프니를 타고 한참을 달려
부두에 도착하니 우리가 탈 배가 대기하고 있었다. 바다에서 어린아이들이 수영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난 후 필리핀의 전통배인 방카에 차례로 올라탔다. 선착장과 배 사이에 널빤지 하나를 걸쳐놓고 선원들이
지지대 역할을 하는 나무 막대기를 붙잡고 서서 건너게 했는데, 불안하고 무서웠지만 선원들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배에
올라탈 수 있었다. 배를 타고 난루수완섬으로 가는데 파도가 심하게 쳐서 멀미가 났다. 중간에 스노클링 체험을 했는데
얼떨결에 선원들이 하라는대로 구명조끼를 입고 스노클 무는 법을 배우고 오리발까지 신고 바다속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호흡할 줄을 몰라 짜디짠 바닷물만 잔뜩 먹고 실신 직전에 겨우 배 위로 기어 올라왔다.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아찔한
체험이었다. 어머니는 물 만난 고기처럼 스노클링 체험을 즐기셨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즐거워하시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나아졌다. 스노클링 체험을 마치고 난루수완 섬으로 향했다. 난루수완 섬에 도착하자 비가 억수같이 내렸다. 스노클링을
하느라 몸이 젖은데다 비까지 내려서 너무 춥고 배도 고팠다. 점심으로 바비큐 그릴요리를 먹었는데 배가 무척 고팠던
터라 밥을 싹싹 비웠다. 육류와 오징어, 생선구이, 새우 순으로 바비큐 요리들이 나왔는데, 생선구이는 향이 너무 강하고
맛이 시큼해서 도저히 먹을 수 가 없었다. 생선구이를 제외하고는 모두 입맛에 맞았는데 특히 오징어와 새우가 맛있었다.
그러나, 새우 바비큐는 밥을 다 먹은 후에야 나온 바람에 늦어서 몇 개 먹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점심을 먹고 난 후 다시
방카를 타고 막탄섬으로 돌아왔을 때 날이 완전히 개어 햇빛이 비쳤다. 햇빛에 비쳐 반짝이는 물빛이 아름다웠다.
리조트에 도착한 후 부모님과 큰 조카와 함께 모감보 스파에서 온천욕을 했다. 온천욕을 마치고 방에 돌아와 샤워하고
나서 휴식을 취했다. 올케가 방으로 찾아와 막탄 시내 마트에서 구입한 망고주스 분말 팩을 건네며 기념품으로 가져가라고
했다. 저녁에는 갈라파고스 비치 야외식당에서 테마디너를 즐겼다. 요일마다 다양한 테마가 정해져 있어 세계각국의
요리를 공연과 함께 즐길 수 있는데 오늘, 금요일밤의 테마는 사하라 나이트였다. 화려한 벨리 댄스와 전통공연을 보며
케밥등의 중동음식을 뷔페로 먹을 수 있었다. 저녁식사를 하며 공연을 보다가 중간에 피곤해서 숙소로 돌아왔다.
막 씻으려는데 조카들이 컵라면을 하나씩 들고 찾아왔다. 큰언니의 외동딸이며 조카들중에 제일 맏이인 예인이부터
작은언니네 남매인 동석이, 승연이, 그리고 동생네 두 아들 호준이와 희준이까지, 막내조카 연지만 빼고 조카 다섯이
와서 컵라면을 끓여 먹었다. 뒤이어 큰언니와 작은 언니, 남동생이 방으로 놀러와서 커피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다가 각자
방으로 돌아갔다. 조카들과 언니들, 그리고 남동생이 자기들 방으로 돌아가고 나서야 겨우 씻고 피곤한 몸을 침대에
뉘였다. 오늘 하루도 피곤했지만 행복하고 즐거웠다. 세부에서의 마지막 밤이라는 아쉬움과 내일은 또 어떤 하루를 보내게
될지 기대하는 마음이 교차했다. 아직도 세부에 온 것이 꿈 같고 가슴속엔 설렘으로 가득하다. 정말 세부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부에서의 마지막날 아침이다. 눈을 떴지만 여전히 비몽사몽이다. 에어컨 바람이 춥고 아버지가 밤새 코를 고는
소리에 잠을 설쳤다. 뒷목이 뻐근하다. 이불속에서 이리뒤척 저리뒤척하다가 일어나 앉았다. 발코니에 나가 밖을 보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늘은 날씨가 화창하기를 기대했는데 아쉬웠다. 세부에 온 이후 하루에 한 번씩은 비가 온 것 같다.
그러다가도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이 말끔히 개어 햇빛이 비치곤 했다. 오후에는 비가 그치고 날이 개기를 기대해본다.
아침식사를 한 후에수영장에서 물놀이를 했다. 바닷물을 끌어올려 만든 해수풀인 인공비치에서 카약을 타고 놀다가
바닷가로 가서 잠시 바다를 구경하고 돌아왔다. 방에 돌아와 샤워 후 옷을 갈아입고 짐을 챙겼다. 12시까지 체크아웃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조카들과 언니들, 동생과 올케, 작은형부까지 모두 우리방으로 와서 컵라면과 남은 간식들을 먹으며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로비에 모두 모여서 체크아웃을 하고 짐을 맡긴후 아이들은 수영장으로 가고 어른들은
각자 스케줄대로 남은 시간을 즐겼다. 부모님과 두 언니와 나, 그리고 동생은 점심때가 되어 배가 출출해지자 리조트내
일식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제 갓 돌이 지난 막내 연지가 종업원에게 재롱을 떨고 말춤을 추며 웃음을 선사했다.
점심을 먹고 나서 아이들이 놀고있는 수영장으로 갔다. 비가 그치고 잠깐 햇빛이 비치더니 오후가 되자 다시 날씨가
흐려졌다. 조카들은 물에서 나와 간식을 먹고는 다시 수영장으로 뛰어들었다. 수영장에 너무 오래 있어서 아이들이 감기에
걸릴까봐 걱정이 되었다. 비치 의자에 누워 잠시 눈을 감은 채 상념에 젖었다. 큰 조카 예인이는 자전거를 타다가 수영장
으로 와서 내 옆의 비치의자에 누운 채 아이팟으로 노래를 들었다. 중학생인 예인이는 요즘 부쩍 많이 자란 느낌이다.
제법 의젓해지고 옆에 있으면 든든해서 의지가 된다. 어머니와 큰언니, 올케, 작은형부는 시내의 마사지 샵으로 마사지를
받으러 가고 아버지는 수영장 주변을 거닐고 있다. 세부의 하늘에 구름이 잔뜩 끼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하다.
희준이가 물놀이를 그만두고 나와 타월을 몸에 둘둘 감아 두른채 오들오들 떨며 작은언니가 준 치즈를 먹고 있다. 수영장
주변을 거닐던 아버지는 비치의자에 누워 쉬고 계셨다. 문득 수영장을 물을 보니 물 위에 동그라미가 수없이 그려지고
있었다. 비가 오고 있는 것이다. 다급하게 아이들을 불러 수영장에서 나오게 했다. 비가 크게 퍼부을 것 같더니 금새
그쳤다. 세부의 마지막 날 하루가 이렇게 시간이 가고 있다.
어머니와 큰언니 일행이 마사지 샵에서 마사지를 받고 리조트로 돌아왔다. 이어 아버지와 작은언니, 나, 남동생이 셔틀
버스를 타고 마사지를 받으러 갔다. 마사지샵은 리조트에서 10분거리에 있었다. 난생 처음 받아보는 마사지여서 아프기도
하고 적응이 안됬지만 받고 나니 시원했다. 마사지를 받고 리조트로 돌아오니 날이 이미 다 저물었다. 로비에서 짐을 찾고
기념으로 가족 단체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셔틀버스를 타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세부시티로 출발했다.
사흘간 행복한 시간을 보낸 플랜테이션 베이여, 이젠 안녕!
막탄과 세부 본섬을 연결하는 다리를 건너 세부시티로 들어서자 불야성의 야경이 우리를 맞이했다. 세부시티는 막탄
시내보다 훨씬 번화하고 도시다운 세련미가 있었다. 세부의 유명한 패밀리 레스토랑인 까사베르데에서 푸짐한 저녁
식사를 했다. 그러나, 정작 나는 속이 좋지 않아서 다시 먹어볼 기회가 없을 지도 모를 음식들을 눈앞에 두고도 많이
먹지 못했다. 호텔에서 화장실을 해결하지 못하고 바로 버스를 타고 먼거리를 이동한 후유증 때문이었다. 더 견디기
힘들어 화장실을 갔다왔지만 속시원히 해결되지 않아 여전히 힘들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난 후 다시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원래 쇼핑몰을 구경할 예정이었지만 시간이 부족해 바로 막탄공항으로 가야했다. 밤 9시 30분쯤에
막탄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는 입국때처럼 한국 관광객들로 넘쳐났다. 출국수속을 하고 탑승시간까지 대기실 의자에
누워서 쉬며 기다렸다. 속이 불편해 공항 화장실에 갔는데, 막상 문을 열고 맞닥드린 화장실이 생소하고 충격적이어서
도무지 볼일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국 부대끼는 속을 달래며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기나긴 기다림 끝에 새벽
2시가 다 되어서야 한국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이제 세부와 작별할 시간. 사흘간의 짧은 여행이었지만 참으로 행복하고
꿈같던 시간이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세부가 그리워질것 같다. 굿바이 세부!
새벽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아침을 맞이했다. 비행기에서 맞이하는 아침, 색다른 느낌이다.
너무 피곤해서 기내에서 잠이 들었다. 비몽사몽간에 기내식을 먹고 다시 잠들었다가 깨어보니 인천공항이었다. 드디어
고국으로 무사히 돌아왔다는 생각에 안도감과 함께 마음이 편안해졌다. 인천공항에서 작은언니네와 동생네 식구들과
아쉬운 헤어짐의 인사를 나누고 큰언니네와 함께 공항버스를 타고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김포공항에서 제주행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에 도착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마치 몇 달만에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었다. 큰형부가 공항에 마중나와 있었다.
큰언니네 식구와 함께 해장국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오랜만에 얼큰한 국물을 먹으니 속이 확 풀렸다. 점심을 먹고 나서
형부가 승용차로 서귀포까지 태워다준 덕분에 편하게 집에 올 수 있었다. 형부의 배려가 고마웠다.
집에 와서 바로 화장실로 직행했다. 거의 하루 동안 해결하지 못해 힘들었던 것을 해결하고 나니 비로소 살 것 같았다.
비록 새벽 비행기를 타고 오고 가느라 불편하고 힘들었지만 세부여행은 오래도록 가슴에 남을 만큼 즐겁고 행복했다.
남들이 보기에 유럽이나 미국 여행도 아니고 요즘 흔하게 가는 세부 여행이 뭐 그리 새삼스러울 것이 있겠느냐고 할 지
모른다. 그렇지만 내게 세부는 특별한 의미로 기억될 것이다. 처음으로 온 가족이 함께한 해외여행이었고, 무엇보다
내 개인적으로도 첫 해외여행이기 때문이다. 처음이라는것은 다시 없는 것이기에 그 자체로 소중하고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다. 세부는 내게 첫 정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가슴 설레는 첫사랑의 기억처럼 세부는 그렇게 아름다운 추억으로 ,
또한 아련한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잊지 못할 여행이 되었다.
2012. 11.26.